<왼쪽: 사쿠라바 카즈시 / 오른쪽: 타무라 키요시>
2008년도 몇 일 남지 않았다. 매달 열리는 UFC나 드림, K-1 이벤트를 하나하나 보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가고, 섣달 그믐에는 항상 프라이드FC의 연말 격투기 무대인 <남제>를 보며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곤 했었지. 프라이드FC가 소멸하고, K-1의 소유주인 FEG산하 드림으로 개편되면서 올해는 <다이너마이트!! 2008>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단다. 여느 때처럼 대진표를 살펴보고 그중 알짜를 골라내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 '다이너마이트!! 2008'
2008년 12월 31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결정대진카드-
종합격투기 룰 경기
세미 슐트 vs. 마이티 모
토코로 히데오 vs. 나카무라 다이스케
사쿠라바 카즈시 vs. 타무라 키요시
아오키 신야 vs. 에디 알바레즈
요아킴 한센 vs. J.Z 칼반
제롬 르 밴너 vs. 마크 헌트
K-1 룰 경기
카와지리 타츠야 vs. 타케다 코조
무사시 vs. 게가드 무사시
사토 요시히로 vs. 아르투르 키센코
K-1코시엔 준결승전
쿠사카베 류야 vs. 우라베 코야
히로야 vs. 시마다 쇼타
현재까지 나온 대진표고, 이 외에 미르코 크로캅과 최홍만, 미노와맨, 알리스타 오브레임, 세르게이 하리토노프 정도의 선수들이 더 추가되지 않을까 싶다. 청률이 보증수표인 야마모토 키드나 마사토는 부상 때문에, 효도르, 추성훈은 계약 문제로 인해 못 나올 확률이 높아 개최사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을 정도의 대진표로 보인다. 무엇보다 FEG 특유의 병맛 매치로 손색이 없는 카와지리 타츠야 vs. 타케다 코조 / 무사시 vs. 게가드 무사시가 심금을 울린다. 드림 라이트급 그랑프리에서 제대로 퓨드가 맺어진 카와지리 타츠야 vs. 우노 카오루는 어따 팔아먹고 말야 -_-;; 미르코 크로캅과 알리스타 오브레임의 재전은 내년에 써먹기로 했다 치고, 입식격투기의 슈퍼스타 바다 하리도 낼 수 없으니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해야겠지. 그래도 라이트급만큼은 UFC와 비교해도 그다지 꿀릴 게 없는 드림이다 보니 아오키 신야 vs. 에디 알바레즈 / 요아킴 한센 vs. J.Z 칼반은 명승부가 될 전망이다. 요 경기들은 절대 놓치지 마시길...
경기력을 떠나서 역사적인 의의(?)로 뜻깊게 봐야 할 대결도 있다. 바로 사쿠라바 카즈시 vs. 타무라 키요시. '그레이시 헌터'라는 이름으로 초기 프라이드FC를 반석에 올려놓고, 일본 종합격투기의 오늘을 만든 IQ 레슬러 사쿠라바 카즈시와 그의 선배이자 높이 평가받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늘 시무룩하고 고고한 천재 타무라 키요시가 드디어 마침내 결국 붙는다. 마니아들이라면 정말 꿈에도 보고 싶었을 경기지만 둘다 내일 모레 마흔을 앞두고 있어 노인정 매치라고 불러도 틀리지는 않을 터. 그래도 1990년대 초반 실전을 표방했던 프로레슬링 단체 UWF(그래서 두 사람을 아직도 U계열로 부른다)의 선후배로 만나 은근히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이 은퇴를 목전에 두고 기어이 대결한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초기에는 타무라의 명성이 더 높았다고 한다. 허나 두 사람의 스승격인 다카다 노부히코(프라이드FC의 제너럴 매니저 역할 정도)가 힉슨 그레이시에게 완패하면서, 사쿠라바가 스승의 복수를 위해 힉슨의 형제들인 그레이시 가문을 차례차례 격파하게 되고 이런 이야기들이 세간에 알려지자 일본인들의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실상 이때가 일본 종합격투기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후배 사쿠라바가 화려하게 비상한 반면, 프로레슬링이나 얼굴을 때리지 않는 '링스'에서만 활약하던 타무라는 종합격투기가 지나치게 난폭하고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듯하다. 현대 MMA의 조류에서 한발짝 물러나 어느덧 올드 패션이 되어버린 격투기 스타일만을 고수하던 타무라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링스의 도산으로 마침내 타무라가 프라이드FC에 합류하게 된다. 당대 최고 인기 스타였던 사쿠라바가 쇼맨십이 강하고 유쾌하다면, 타무라는 늘 심각하고 진지한 이미지다. 선후배 시절부터 사쿠라바는 타무라와 기질적으로 그다지 맞지 않다고 느꼈던 듯 곧바로 대결을 요구한다. 하지만 타무라는 묵묵부답. 타무라는 철저하게 묵묵히 매치업이 잡히면 경기를 수행하고 이기든 지든 심드렁하게 경기장을 떠나곤 했다. 그야말로 '난 종합격투기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뿐이야'라는 느낌이랄까. 사쿠라바에게 3연패를 안긴 반달레이 실바와의 경기에 임하면서는 "이따위 시합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관중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까지 했다니 과연 자기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는 고고한 남자다. 물론 주최측은 몸이 달았다. 두 사람의 오랜 은원 관계(?)를 알고 있기에 드림 매치가 나올 게 당연한데 타무라가 한사코 마다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장인 사카키바라가 눈물로 읍소해도 결국 타무라는 사쿠라바와 경기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타무라는 행여 자신이 사쿠라바와 경기를 가지면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발을 빼고 싶었던 종합격투기의 인기를 높이는 기폭제가 되지 않을까 하여 드림 매치를 거절한 게 아닐까. 만약 사쿠라바를 이긴다면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겠다, 는 그 정신을 나는 높이 사고 싶은 것이다. 일본 종합격투기 사상 최고의 '드림 매치'가 될 수 있었던 대전을 줄기차게 거부하다가 나이가 들어 경기력이 지극히 떨어진 오늘에 와서야 프라이드FC도 아닌 드림에서 승인해 기어코 '퇴물 매치'를 만들어버리고 만 타무라의 오기와 고집에는 역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마흔을 앞둔 두 노장의 퇴물 매치로 종합격투기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또 한 번 낱낱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타무라, 당신은 진짜 고고한 남자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이미 입장곡인 <Flame of Mind>에 맞춰 무표정으로 입장한 후, 그럭저럭 경기를 마치고 언제나처럼 시무룩하게 퇴장할 타무라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 모습을 어서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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